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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3] 제주43평화공원, 평화기념관 방문 및 해설

☞하쿠나마타타 2025. 10. 5. 18:10

 

[제주#3] 제주43평화공원, 평화기념관 방문 및 해설

 
나도 제주43사건, 43사건 이라는 말만 들었지 뭔지 그게 뭔지 전혀 알지를 못했다.
제주에 와서 제주43평화공원과 평화기념관을 방문하여 해설사분께 1시간 30분여 해설을 듣고 나서
제주43 은 그 당시 제주 사람 누구나 겪은 뼈아픈 사건으로 고립된 제주도에서 공권력에 의한 끔찍한 학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었다. 공권력에 저항?하는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에 의해 희생된 사람도 제법 있고, 오랜 기간 여러 스토리가 엮어 있어 아직 제주43은 정명이 없다고 한다.
제주43사건에서 '사건'도 정부 조사 보고서?에 그렇게 이름을 붙인 거라고...

제주 첫 방문지가 제주43평화기념관이 되었다.
해설사분께 1시간 30분 가량 해설을 듣고 나서 제주를 오면 무조건 들러서 제주43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불과 2000년도 전까지만 해도 제주 사람들도 제주43에 대해 쉬쉬했다고 한다.

제주43평화기념관

제주43평화기념관 입구. 
관람시간은 09:00~18:00, 매월 첫째 셋째 월요일은 휴관

해설 하는 시간대는 엄청 자주 있고, 우리는 미리 예약을 하고 왔는데
우리나라를 돌아보면 보통 사람들이 해설을 별로 이용 하지 않아 현장에서 요청하거나 합류하면 된다.
해외가면 뭐 하나 할려면 전부 돈인데 우리나라 여행하면 이런 것이 너무 좋다.

전시해설 시작되는 곳.
동굴을 모티브로 제주43으로 들어간다.

동굴 끝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백비가 있는데, 제주43의 정명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해방 당시 제주도에는 7만 여명의 일본군이 있었다.
1945년 6월 민간인 12만 명을 포함 20여만 명이라는 막대한 인명피해 속에 오키나와 섬이 미군에 함락당하자, 일본군은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막기 위한 최후의 보루로 제주도에 대군을 배치하고 온 섬을 요새화했다.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하면 한라산 밀림지대로 숨어 마지막까지 유격전을 펼친다는 작전까지 세웠지만 2개의 핵폭탄으로 전쟁은 끝난다.

미군은 1945년 9월 28일 제주에서 일본군 항복조인식을 따로 가졌다. 
제주도의 군사전략적 가치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해방되면서 일본 공장과 전쟁터에 끌려갔던 제주도 청년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 해 동안 당시 제주 인구의 4분의 1이 넘는 6만여명이 귀향했다.
민족적 차별을 몸소 체험했던 이들은 자주적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열망이 강했고, 자연스레 교육에 힘쓰는 학교세우기 운동이 번져 갔다.
1947년 미군정이 남한 각 지역의 교육수준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초등학교 이상 졸업생 비율이 전국 1위였다.
일본에서 일하며 온갖 민족적 차별과 설움을 맛본 제주 청년들의 자연스런 삶에 대한 의지였을 것이다.

패망한 일본의 일장기는 내려가고, 미국 성조기가 올라가고 있다.

미군정은 식민치 통치기구를 그대로 존속시키고, 일제 관리와 경찰을 적극 등용했다.
이로 인해 친일파들이 오히려 큰소리치는 세상이 되면서 민심을 자극시켰다.

1946년 제주는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제주도가 되었다.
많은 물자를 육지에서 의존해야 하는데 전라남도에서 지원이 없어진다는 뜻도 된다.

1947년 3월 1일 해방이 되어도 미국과 소련 사이 냉전 조짐으로 통일독립정부 수립은 멀어져가는 분위기 속에 "통일독립 전취하자!" 란 슬로건으로 뭉친 날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아이가 칬는데 기마경관이 그냥 가자 주변 구경꾼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는데 경찰이 발포하게 된다.
경찰의 발포로 초등학생, 갓난아기를 안은 여인, 40대 농부 등 6명이 죽고, 8명이 총상을 입는다. 
사망자 6명 중 5명은 등 뒤에 총탄이 박힌 사실도 확인되었다.

그러나 미군정과 경찰은 사과하기는 커녕 도리어 정당방위를 주장하며 시위 주동자를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잡혀간 사람들이 고문당한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제주도민의 분노는 더욱 커져갔다.
그래서 1947년 3월 1일 발포 사건이 제주43의 원인이라 보기도 한다.

미군정과 경찰에 대한 제주도민의 분노는 총파업으로 나타났다.
1947년 3우러 10일부터 민관 총파업이 시작됐다.
파업은 제주도청부터 법원, 검찰 등 관공서, 운수회사, 통신기관, 금융기관, 학교로 퍼지고, 상점도 문을 닫았다. 
166개 기관과 단체 41211명이 파업에 참여했고, 제주 출신 경찰관 66명도 파업에 동참했다.
1947년 3월 1일 발포는 제주경찰이 아니라 일주일 전 육지에서 급파된 응원결찰에 의해 이루졌다.

미군정은 민심을 수습하기보다 색안경을 쓰고 제주사람을 보았고, 레드 아일랜드 즉 붉은 섬으로 규정하고, 탄압을 시작했다.

1947년 3월 14일부터 미군정의 한국인 경찰총수 조병옥 경무부장이 전면에 나서,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 421명을 거느리고 파업 주모자들을 검거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경무부 차장 이경진은 "제주도 주민 90%가 좌익색채"라고 공표하는 등 제주도 상황을 이념적 시각으로 몰고 갔다.
1948년 43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의 제주도민이 검속됐고, 3.3평 유치장에 35명을 가두었다는 기록도 있다.

미군정의 탄압이 심해지며 많은 청년들이 검거를 피해 도외로 혹은 일본으로 떠났고, 일부는 한라산 동굴 등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피신하기 시작했다.
1928년 3월 3건의 고문치사사건이 잇달아 일어나 민심을 더욱 자극시켰다.
1948년 2월 UN이 한반도 가능지역 내의 선거 실시 를 결정하자 전국이 요동쳤다.
그것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의미했기 때문이고, 제주사회 역시 분단을 반대하는 여론이 우세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남로당 제주도당 산하 유격대 350명이 제주도내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무장대의 무기는 아주 조악했고, 그 숫자도 많아야 500명 정도였다고 한다.

1948년 4월 28일 유격대(무장대)와 미군정 사이에 평화협상이 이루어졌다.
김익렬 중령 유격대(무장대) 총책임자 김달삼이 서로 만나 협상을 벌여 유격대의 무장해제까지 약속했다고 한다.

평화협상이 이루어지고 나서 1948년 5월 1일 제주 오라리에 방화사건이 발생한다.
오라리 방화사건 이틀 후 1948년 5월 3일, 미군정은 무장대를 총공격하라고 경비대에 명령했다.
오라리 방화사건은 평화협상을 방해하기 위한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의 공작 이라는 말에 무게가 실린다.

1948년 5월 10일 5.10 총선거에서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만 투표율 50% 미만으로 선거 무효 처리된다.

"원인에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 뿐"
미군정에서는 1948년 6월 23일 재선거를 밀어부칠려고 했다.
죄가 있건 없건 선거에 방해가 된다는 명분으로 청년들을 무조건 잡아들였고, 마을에 군인이나 경찰이 나타나면 보초들이 신호를 보냈고, 청년들은 무조건 달아났다.
1948년 5월 22일부터 6월 30일까지 검거된 사람이 5천여명에 이른다고 집계했다.

남한에서 실시된 5.10 선거가 제주에서 유일하게 보이콧되자 남한에 있던 미군 사령관들은 분개했다.
그 이후 섬 주민들을 대상으로 청소하는 작전 을 착수했다는 미국 뉴욕타임스의 보도기사가 이런 흐름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신생 이승만 정부는 자신의 정통성에 걸림돌이 되는 제주도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미군도 제주도 소요사태를 조속히 끝내기를 독촉했다.
1948년 10월 17일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이 정부의 최고 지령을 받들어 제주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제주의 지형상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중산간 지대에는 1백여 마을이 있었고, 수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제주 전체 면적의 80%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서 국제법에서 금지된 초토화작전이 감행되었다.
이 지역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총살이 자행됐다.
소, 말, 돼지 등 가축들도 폭도들의 양식이 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몰살됐다. 
중산간마을 가옥 4만여 채도 토벌대의 방화로 불탔다.
그야말로 제주도 전체가 불바다가 됐다.
10월 19일 제주도에 파병명령을 받은 여수 제14연대 일부 병력이 "동포를 죽일 수 없다."며 총부리를 돌려 일어난 여순사건
11월 17일 제주도지역에 내려진 계엄령은 이런 학살극을 더욱 부채질했다.

토벌대가 쫓은 한 청년의 가족은 모두 죽었고, 살아남은 청년은 6.25전쟁에 참전하게 됐다는 기구한 운명

"하루라도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없다"
저런 말이나 하고, 마약에 취해 있던 자가 제주도민의 생사를 쥐고 있었다.

판결문도 없이 중형을 내리고, 육지의 형무소로 보내지기도 하고, 6.25전쟁으로 형무소 수감자들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경찰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을 해제하여 1947년 3.1절 발포사건 이후 7년 7개월 만에 제주43은 공식적으로 종식됐다.

이후 제주43은 희생자뿐 아니라 후손과 남은 가족에게 해체된 가족으로 인한 고통은 물론 연좌제와 국가보안법으로 큰 고통은 준다.

당시 제주도민의 10분의 1 인 2만5천~3만여명의 제주 사람이 희생됐고, 확인이 된 사람은 15,088명 이라고 한다.

제주43 특별법은 2000년 1월 12일 제정 공포됐다.

특별법 공포 하루 전날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진상규명 운동에 앞장서 온 유족 시민단체 8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43특별법 제정 서명식 모습

제주43과 관련된 많은 책들이 있었다.

첫째는 마그넷 하나 구입

제주43의 상징꽃 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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