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는 해설이 아주 잘 되어 있었다. 대부분 전주한옥마을과 경기전 주변이라 접근성도 매우 좋다.
비지트전주 도보해설투어 : https://tour.jeonju.go.kr/index.jeonju?menuCd=DOM_000000106008000000
경기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초상화)을 모시기 위해 태종 10년(1410년)에 세워진 신성한 공간이다.
처음에는 어용전이나 태조진전 등으로 불리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경사스러운 터에 지어진 궁궐'이라는 뜻을 담아 경기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경기전이 특별한 이유는 조선 시대에 태조의 어진을 모셨던 여러 곳(한양, 영흥, 개성, 경주, 전주) 중에서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적이기 때문으로, 원래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버렸지만, 광해군 6년(1614년)에 전주 시민들과 관원들이 힘을 모아 지금의 모습으로 중건했다.
구조를 보면 태조 어진이 있는 정전을 중심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전주사고(실록각), 그리고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 부부의 위패를 모신 조경묘 등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

경기전 입장권.
어른은 3천원, 청소년 2천원, 어린이 1천

홍살문은 신성한 장소를 보호하는 상징적인 문으로 주로 궁궐, 관아, 능묘, 그리고 향교나 서원 같은 곳의 입구에 세워졌는데, 경기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초상화)을 모신 신성한 공간이기 때문에 정문 바로 뒤편에 이 홍살문이 세워진 것이다.
기둥을 붉은색으로 칠한 이유는 붉은빛이 귀신이나 액운을 물리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문 상단에는 살대가 촘촘히 박혀 있고 그 가운데에는 우주의 음양 조화를 상징하는 삼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정전이라는 곳으로 안에 있는 태조 이성계 어진은 가짜이고, 진품은 어진박물관에 따로 모셔져 있다고 한다.

경기전 내에 대나무 숲이 조성된 이유는 조선 왕실의 신성함과 위엄을 지키기 위한 상징적 의미도 있고, 시선과 소음을 차단하는 성벽 역할을 하기 위한 실용적 목적도 있다.
그리고 불이 났을 때 대나무가 타며 따닥따닥 큰 소리를 내며 타기 때문에 화재 사실을 알리는 역할도 한다.

실록각.
전주 경기전 내에 있는 실록각은 조선왕조실록을 안전하게 보관했던 전주사고의 건물이다.
조선은 국가의 중요한 역사 기록인 실록을 불타거나 사라지지 않게 하려고 전국 네 곳(한양, 충주, 성주, 전주)에 나누어 보관했는데 이를 사대사고라고 불렀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전주 경기전 내에 설치된 전주사고이다.
전주사고와 실록각이 역사적으로 정말 중요한 이유는 임진왜란 때 다른 사고들이 모두 불타버렸을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실록이기 때문인데 당시 전주의 선비들이었던 안의와 손홍록 등이 실록을 정읍 내장산 등으로 피신시켜 목숨을 걸고 지켜낸 덕분에 조선 전기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지금 경기전에서 볼 수 있는 실록각 건물은 1991년에 재건된 모습으로 사진 속 건물을 보면 아래층에 기둥만 있고 마루가 공중에 떠 있는 형태인데 습기를 막고 실록을 잘 보존하기 위해 그렇게 지어졌다.

실록청에서 실록 편찬 모습
임금께서 훙서(사망)한 후에 실록을 편찬·기록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하였다. 실록청의 관원들은 시정기와 사관들이 기록한 수많은 사초들로부터 기사를 취사선택하고 정리·요약하여 실록을 편찬한다.

전주사고 The Jeonjusago National History Archive
1439년 외사고의 설치가 결정되었으나, 1445년 실록 봉안이 이루어질 당시까지 전주에 사고가 건립되지 않았다. 따라서 전주사고에 보관하기 위해 내려보낸 『태조실록』, 『태종실록』은 전주성 내의 승의사 등에 안치되었다.
이후 실록은 1464년 가을에 전주객사 북쪽에 있는 진남루로 옮겨졌다가, 1472년 『세종실록』과 『예종실록』이 완성됨에 따라 전주에 양성지를 봉안사로 파견하고, 이를 계기로 경기전 동편에 실록각을 건립하였다. 이후 실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각 왕대의 실록이 순차적으로 봉안되었다.
전주사고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각종 서적 총 1,322책이 60개의 궤(실록 47개, 기타 13개)에 담겨 보관되고 있었다.


임진왜란과 실록의 보존(피난)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조선왕조실록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태인 지방 선비 손홍록, 안의를 비롯한 무사 김홍무, 수복 한춘 등 전라도 사람들의 죽음을 불사한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들은 실록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겼고, 계속해서 호남지방 침공이 예상되자 내장산을 떠나 아산으로 옮겼다. 이후 실록은 해주로 옮겨졌고, 임진왜란의 전황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1595년에 실록을 강화도로 옮겼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실록은 안주를 거쳐 평안도 안변의 묘향산 보현사 별전으로 옮겨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보존하였다. 실록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영변부 객사를 거쳐 1603년 강화도로 옮겼다.

사고(史庫)의 변천사 요약
|
시기
|
구분 및 보관 장소
|
특징 및 역사적 의의
|
|
조선 전기
(임진왜란 이전) |
춘추관, 충주사고, 성주사고, 전주사고
|
네 곳에 실록을 나누어 보관했으나,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를 제외한 나머지 세 곳의 실록이 모두 불타버림
|
|
조선 후기
(임진왜란 이후) |
춘추관, 태백산사고, 오대산사고, 마니산사고(강화), 묘향산사고
|
전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깊은 산속(실록 수호 사찰 부근)에 사고를 설치해 분산 보관함
|
|
이후 재배치
|
정족산사고(강화), 적상산사고
|
화재나 전란의 위험에 따라 마니산에서 정족산으로, 묘향산에서 적상산으로 실록을 안전하게 이동 및 재배치함
|

세초연 세초하는 모습
실록편찬에 사용된 사초는 물에 씻어 그 내용을 모두 없앴으며, 이에 씻은 종이는 재활용하였다. 태조와 마지막 왕을 제외하고는 역사인 세초연을 베풀었다.

1439 (세종 21) : 전주에 사고설치
'세종실록'에 의하면 "전주에 사고를 두고 안치하게 함"이라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 21년 7월 19일
1445 (세종 27) : 실록 정식 봉안 (태조~태종)
1464 (세조 10) : 역사 후원의 진남루로 실록 이전
1472 (성종 3) : 실록봉안사 양성지 경기전 동편에 실록각 건립 건의 ➔ 실록각 공사 시작
1473 (성종 4) : 실록각 중공 (정식으로 실록 보존 시작 - '세종실록'·'예종실록')
1592 (선조 25) : 조선왕조실록 이안 (임진왜란 발발로 인한 피난)
1597 (선조 30) : 실록각 소실 (정유재란 당시 화재)
1614 (광해군 6) : 실록각 자리에 별전 건립
1910 : 실록의 처분 (일제강점기 분실 및 반출)
1991 : 전주사고 복원 (현 경기전 내 실록각 연구소)

조선왕조실록의 편찬방법 The Compilation Process
조선의 역대실록은 왕이 승하한 후에 만들어졌다. 실록편찬은 사관들이 시정기, 사초, 승정원일기 같은 기록들을 모으는 일에서 시작된다. 사관들은 그 자료를 기초로 초초를 작성, 이를 검토해 중초를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쇄대본이 되는 정초를 완성한다. 실록이 완성되면 실록편찬에 사용된 모든 자료는 기밀방지를 위해 세초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사관과 사초
Official Historians and Their Drafts
사관(史官)에는 전임사관과 겸임사관이 있었다. 전임사관은 항상 왕의 곁에서 국정에 관한 모든 일을 기록했고, 겸임사관은 각 관청에서 사관을 겸임하고 있는 자들로 관련 부서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업무처리 내용을 기록하였다.
사관들이 작성하는 사초에는 매일 작성하여 춘추관에 제출한 임시사초(일명 관사초)와 비밀사항이나 인물에 대한 평을 기록한 뒤 집안에 보관하다가 실록청이 설치되면 제출하는 가장사초(家藏史草)가 있었다.
가장사초 제도는 비밀을 보장하고 그 내용을 철저히 돕기 위한 장치였다. 왕도 사초를 볼 수 없었으며, 이로 바탕으로 편찬된 실록도 볼 수 없었다. 실록의 권위는 역사의 기록이면서 최고 통치자와 위정자들에 대한 견제와 감시였다.
세계기록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
A UNESCO Memory of the World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대부터 철종대까지 총 25대 472년간의 조선의 역사를 연월일의 순서에 따라 기록한 것으로 분량이 888책(1,893권)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책이다. 여기에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을 비롯해 천문, 풍속에 이르기까지 조선사회의 제반 모습이 총망라 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실물과 안전한 보존을 위하여 첫 번째 실록인 『태조실록』이 완성된 후부터 실록의 복본(複本)을 만들어 춘추관과 지방의 충주, 상주, 전주에 사고를 지어 보관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를 제외한 삼대 전체가 화를 당하자 실록은 정족산, 태백산, 묘향산(후에 적상산으로 이동), 오대산의 산간지역에 4개 지방사고를 짓고 실록을 보관해 왔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기초적 사료이며, 우리나라 인쇄문화의 전통과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물로서 가치와 독창성을 인정받아 199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1.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부터 OO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역사서이다. (1,893권 888책)
2. 1592년(선조 25)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춘추관과 충주·성주사고의 실록은 모두 화재로 사라졌지만, 다행히 OOOO의 실록이 유일하게 지켜져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역사서가 후세에 전해졌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전되어 있다.
3. 조선왕조실록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임진왜란 당시 경기전 OO OOO과 태인 지방 선비 손홍록, 안의 등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4. 조선왕조실록은 대부분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인쇄한 활자본이지만, 전주사고에 보관되었던 태조실록·태종실록과, 조선 후기 정조대왕의 뜻으로 쓴 OOO등은 남겨있다.
5. 조선왕조실록은 1973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승정원일기와 함께 유네스코 OOOOOO로 등재되었다.
6. 조선왕조실록에서 상기전(상기원)은 OOO의 한글말이다.
7. 고려왕조실록도 태조 대부터 OOO까지 34대 474년간(918~1392)의 역사를 담은 실록을 편찬하였으나, 임진왜란 당시 승춘관의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8. 조선시대에는 OOO에서 실록 편찬을 담당했다.
9. 실록 보관은 OO에 한 번씩 실시되었다. (포쇄의 3대 내용)
10. 현재 OOOOO은 전주사고에 보관되었던 태조실록·정종실록을 재현하여 보관하고 있다.

조경묘는 경기전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사당으로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 부부의 위패를 모신 신성한 공간이다.
조선 왕실의 뿌리가 시작된 곳을 기리기 위해 영조 32년(1756년)에 세워졌으며, 경기전과 마찬가지로 함부로 들어갈 수 없도록 주변을 둘러싼 문과 담장으로 엄숙하게 보호받고 있다.

조경묘
조경묘(肇慶廟)는 '조선왕조 창업의 경사가 시작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조경묘는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과 시조비 경주 김씨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조선 왕실의 시조 사당이다. 이한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21대조이다.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이안사가 강원도 삼척을 거쳐 함경도 의주로 옮겨갈 때까지 전주 이씨가 대대로 살던 곳이다.
조경묘는 영조 47년(1771년)에 경기전 북쪽에 세워, 영조가 세손(정조)에게 쓰게 한 전주 이씨 시조 내외의 위패를 모셨다. 조경묘는 태조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신 경기전, 이한의 묘역인 조경단, 태조의 고조할아버지가 살던 이목대와 함께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임을 상징하는 곳이다.

어진박물관

경기전 내부의 어진박물관 현판

태조 어진
진품은 수장고에...

태조어진 (太祖御眞)
2011년, 비단에 채색, 150×220cm, 권오창 모사
태조어진은 1410년(태종 10) 전주 경기전에 봉안되었으며, 현존하는 태조어진은 1872년(고종 9) 조중묵을 비롯한 10인의 화사가 새로 모사한 영정이다. 현재 전시되고 있는 어진은 2011년 권오창 화백이 모사하였다.
태조의 권위와 위엄이 돋보이는 어진으로 왕인의 정면을 그린 전신상이다. 머리에 익선관을 쓰고 청룡포를 입었으며, 흑석을 신었는데 이는 평상시 집무복을 입은 모습이다. 눈과 입은 작고 귀는 크며, 오른쪽 눈 위에는 사마귀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태조는 키가 크고, 몸이 반듯하며 귀가 크다고 하였다.

어진실 ROYAL PORTRAIT EXHIBITION GALLERY
조선시대 왕들은 대부분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조선 초에는 생전에 그리지 못한 경우 다음 왕대에 그렸다. 태종은 생전에 어진을 그렸지만 '털끝 하나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여 자신의 어진을 없애라고 하였으나, 아들 세종은 차마 그릴 수 없어서 보존해 두었다. 조선 중기의 인종은 생전에 어진을 그리지 않았을뿐더러 그리지 말라고 유언을 남겨 결국 제작되지 못하였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쫓겨난 왕으로 어진 제작 여부를 알 수 없으며, 인조, 효종, 현종은 어진 제작에 대한 기록이 없다. 숙종 이후부터는 어진제작이 활발해져 여러 본을 동시에 제작하기도 하였다. 영조는 10년마다 어진을 그리려고 하였으며, 정조 역시 세 번이나 다양한 복장으로 어진을 제작하였다.
이처럼 활발한 어진의 제작에도 불구하고, 태조에서 순종까지 27대 임금의 초상화 중에서 현존하는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어진뿐이다.
어진실에서는 현존하는 영조, 철종어진 모사본과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세종, 정조, 고종, 순종 어진 모사본 6점을 만나볼 수 있다. 세종과 정조어진은 남아있지 않아서 기록으로 전해지는 모습과 그 후손들의 골격을 토대로 후대에 그렸으며, 고종과 순종어진은 남아있는 사진을 토대로 모사하였다.

세종대왕 어진

세종어진(世宗御眞) 현대 | 비단에 채색 | 114×164cm | 표준영정 | 김기창 모사
세종은 어진이 남아 있지 않아 실제 용안을 알 수 없다. 현재의 세종어진은 김기창 화백이 추정하여 그린 상상도로 1973년 국가 표준영정으로 공인되었다. 어진박물관 소장 세종어진은 근래에 김영철 화백이 모사한 본이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1418년 22세에 즉위하여 1450년 54세에 승하하였다. 한글을 창제한 성인 군주로 유교 정치의 기틀을 확립하고, 문화와 과학기술을 크게 발전시켰으며, 4군 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

정조 어진

정조어진(正祖御眞) 현대 | 비단에 채색 | 114×164cm | 표준영정 | 이길범 모사
정조는 어진이 남아 있지 않아 실제 용안을 알 수 없다. 현재의 정조어진은 이길범 화백이 추정하여 그린 상상도로 1989년 국가 표준영정으로 공인되었다. 어진박물관 소장 정조어진은 근래에 김영철 화백이 모사한 본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1776년 25세에 즉위하여 1800년 49세에 승하하였다.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수원화성을 축성하였으며, 상업을 진흥시키는 등 조선 후기 문화 계몽의 황금기를 이룩한 명군이다.

철종어진

철종어진(哲宗御眞) 2016년 | 비단에 채색 | 107×202cm | 이철규 모사
철종어진(보물 1492호)은 철종이 31세 되던 1861년(철종 12)에 그린 것이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이안했다가 1954년 화재로 오른쪽이 1/3쯤 소실된 것을 복원하였다. 어진박물관 소장 어진은 2016년 이철규 화백이 모사한 본이다.
군복 차림이며, 초상화에서 보기 드문 손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오른손에 무관의 지휘봉인 등채를 잡고 왼손 엄지에는 활시위를 당길 때 사용하는 깍지를 끼고 있다. 용모에 순수한 인품이 반영되어 있으며, 눈썹이 짙고 쌍꺼풀이 진 동그란 눈에 눈동자가 안으로 모여있다.

영조어진

영조어진(英祖御眞) 2016년 | 비단에 채색 | 60×120cm | 조용진 모사
영조어진(보물 932호) 원본은 51세 때의 모습을 그린 반신상으로, 1900년(광무 4)에 조석진·채용신 등이 모사한 것이다. 어진박물관 소장 어진은 1900년 본을 2016년 조용진 화백이 모사한 것이다. 안색이 붉으며, 눈이 치켜 올라가고 코가 오뚝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깐깐한 성정이 엿보인다.
영조는 1724년 31세에 왕위에 올랐으며, 52년간 재위하다가 1776년 83세에 승하하였다. 조선의 왕 중 최장수 왕이자, 재위기간이 가장 긴 왕이다. 탕평책을 펼치는 등 조선왕조의 중흥을 이끌었으며, 조경묘를 건립하는 등 왕실의 위엄을 높였다.

어진 제작 과정 御眞 製作 過程 | Royal portrait's production process
어진은 제작 시기와 방법에 따라 왕이 생존해 있을 때 직접 보고 그리는 '도사(圖寫)', 왕이 승하한 뒤 기억을 토대로 그리는 '추사(追寫)', 기존의 어진을 본 떠 그리는 '모사(模寫)'로 구분된다

경기전 건립 (慶基殿 建立)
The Construction of Gyeonggijeon
조선 초 1410년(태종 10) 전주에 태조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어용전'이라는 이름으로 진전(眞殿)이 처음 세워졌다. 이후 1442년(세종 24) 전주의 진전을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러운 터'라는 뜻의 '경기전(慶基殿)'이라 칭했다.
경기전은 태조어진을 모신 진전 건축으로, 주로 제사에 관한 길례를 행하기 위해 건립한 예조건축 중 하나이다. 소박함을 추구하는 유교 건축과 달리 기둥 사이에도 공포(栱包)를 배치한 다포 형식을 취하여 화려하다. 또한 건물의 안정된 구조와 조형 비례, 아름다운 단청은 왕실의 권위와 품격을 잘 보여준다.

경기전 건축구조와 각 건물의 기능
Structure of Gyeonggijeon and Function of Each Building
- 전사청(典祀廳) : 전사관(典祀官)이 집무하면서 제사 준비를 하는 곳
- 동재(東齋) / 서재(西齋) : 제관들의 숙소
- 정전(正殿) :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
- 조경묘(肇慶廟) :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과 시조비의 위패를 모시고 보관하는 곳
- 동·서 익랑(東·西 翼廊) : 동익랑은 제례 시 소차가 설치되며, 서익랑은 제례용 물품을 보관해 두는 곳
- 동·서 월랑(東·西 月廊) : 비가 올 때도 제례를 행할 수 있도록 마당을 대신하여 마련한 회랑의 공간
- 용실(舂室) : 제사지낼 때 쓸 디딜방아를 두고 제사용 음식을 만드는 방앗간
- 정자각(丁字閣) : 제사 지낼 때 제례가 거행되고 제관들이 서 있는 곳, 우천 시 행례 대비
- 제기고(祭器庫) : 제사에 사용하는 제기, 기물, 기 등을 보관하는 곳
- 전주사고(全州史庫) : 조선왕조실록과 국가의 중요 서적을 보관 장소
- 마청(馬廳) : 관리들이 말을 두는 곳
- 익랑문(翼廊門) : 정전의 바로 출입문
- 시자(侍者) : 제관 시중들이 거처하는 곳
- 내신문(內神門) : 정전의 바로 출입문
- 수복청(守僕廳) : 수복 등이 거처하는 곳
- 군무당(軍務堂) : 제례 시 소차가 설치되며 군사와 관원들이 주둔하던 곳
- 수문장청·경비현(守門將廳·警備峴) : 정문을 지키던 관원들의 집무 공간
- 신문(神門) : 정문

태조어진 경기전 연표
|
연도 (시기)
|
사건 및 역사적 기록
|
|
1410년 (태종 10)
|
태조어진을 전주 경기전에 처음으로 봉안함
|
|
1442년 (세종 24)
|
전주 진전의 이름을 '경기전'으로 정식 명명함
|
|
1592년 (선조 25)
|
임진왜란 발발로 인해 태조어진과 실록을 안전한 곳으로 이안(피난)시켰으나, 이후 경기전 건물이 소실됨
|
|
1614년 (광해군 6)
|
전주 시민들과 관원들이 힘을 모아 경기전을 지금의 모습으로 중건함
|
|
1872년 (고종 9)
|
조중묵을 비롯한 10인의 화사가 참여하여 태조어진을 새로 모사함 (현재 남아있는 태조어진 원본)
|
|
1954년
|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이안했던 어진들이 화재로 소실되는 와중에도 태조어진은 무사히 보존됨
|
|
2010년
|
태조어진을 안전하게 보존하고 관련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경기전 내에 어진박물관을 개관함
|
|
2011년
|
권오창 화백이 태조어진을 새로 모사함 (현재 어진박물관 등에 전시 중인 어진)
|
-2026년 5월 24일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경기전에서...
'여행 > 국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전주#4] 조선 500년의 역사를 품은 곳 전주 전라감영(70년 만에 복원되어 돌아온 전라감영) (0) | 2026.06.03 |
|---|---|
| [전주#3] 경기전 둘러본 후 전주비빔밥 먹으러 들린 종로회관(맛과 가격에서 좀 실망) (0) | 2026.06.03 |
| [전주#1] 전주 풍년제과(PNB) 본점에서 초코파이 구입 맛보기 (0) | 2026.06.03 |
| [제주#16] 제주항에서 고흥 녹동항으로 차량선적(전기차 배터리 충전량 문제) (0) | 2026.06.02 |
| [제주#15] 제주 협재해변 휴양지 분위기 카페 호텔샌드 (0) | 2026.06.02 |